2011년 12월 31일
심보선 <눈 앞에 없는 사람>
전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도 좋았기에 큰 기대를 했고 역시 좋았다.
'이별'을 '이 별'로 바꿔 쓴 아래 '이 별의 일'이 가장 좋았고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텅 빈 우정' '새' 'Mundi에게' 등도 좋았다.
그런데 정작 가장 좋았던 것은 뒤표지에 실려있는 저자의 산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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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건너온, 물방울 속에 뭉쳐 있는 당신의 전언을 펼쳐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 물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로지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명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 by | 2011/12/31 15:02 | 잡담














